여러분은 한국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혹시 한국의 대중음악, 드라마, 한국 스타 등이 떠오르지 않나요?
전 세계에 한국의 대중문화를 사랑하는 한류 팬들이 1억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한국을 사랑하는 세계의 친구들에게 ‘한국의 세계유산’ 엽서를 소개합니다.
이 엽서는 한국의 유산 가운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12개의 한국 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직지>, <훈민정음>, 김장, 씨름, 아리랑, 판소리, 고창·화순·강화의 고인돌 유적, 석굴암과 불국사, 종묘, 창덕궁,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한국의 갯벌을 소개합니다. 특히 이 가운데에는 인류 역사를 바꾼 위대한 발명으로 꼽히는 금속활자로 인쇄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가 있습니다. 한국의 <직지>는 1455년에 인쇄된 독일의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 앞선 1377년에 인쇄되었습니다. 이 밖에 한국의 유산들도 한국인의 정체성과 지혜를 담은 소중한 문화유산들입니다.
‘한국의 세계유산’ 엽서가 세계인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열어가는 소중한 선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관심이 확장되어 세계인들이 한국인을 친구로 사귀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함께 더 누려가기를 소망합니다. 한국 역사와 문화의 주인공, 한국인들을 만나보세요~!
직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입니다. 1377년 한국의 고려시대(918~1392)에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되었습니다. 직지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박병선 박사(1929~2011)가 직지를 발견하여 1972년 국제도서전에서 소개하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직지가 등장하자 세계인들은 매우 놀랐습니다. 당시 금속활자기술은 독일의 구텐베르크에 의해 발명되었고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은 그가 인쇄한 ‘42행 성서’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려는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할 수 있었을까요? 한국은 일찍부터 인쇄문화가 발달해있었습니다. 최소 751년 이전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인쇄하였고, 직지가 인쇄된 고려 시대에는 금속활자 제작에 필요한 주조기술과 종이와 먹의 제조기술이 발달해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지식과 정보의 빠른 유통을 원하는 지식층의 요구가 있었습니다. 고려의 금속활자기술은 조선시대(1392~1910)로 이어져 더욱 발전했습니다. 활자주조를 담당하는 전문 관청이 설치되었고, 수십만 자의 금속활자가 주조되었습니다. 금속활자 기술은 조선시대 내내 개량되고 발전되었으며, 세계적인 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도 이 금속활자로 인쇄되었습니다.
기록유산은 인류의 역사와 문화, 사상과 철학을 전달하는 인류의 지혜입니다. 2023년 직지가 간행되었던 청주에는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가 건립됩니다. 기록유산을 통해 조상들의 지혜와 기술을 이어 온 한국이 세계의 기록유산을 지키고 발전시키는데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오랜 한국의 역사 속에서 한국인의 지혜로 탄생한 직지는 창조적인 한국의 유산입니다.
<훈민정음>은 한국의 고유한 글자 ‘한글’의 탄생을 알리며 1446년에 발간된 한글의 해설서입니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책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창제 당시 한글의 이름입니다. 한글은 1443년 세종대왕(1397~1450)이 만든 글자로, 과학적이고 체계적이고 독창적인 글자입니다.
<훈민정음>의 크기는 가로 20㎝, 세로 32.3㎝이고 목판으로 인쇄되었습니다. 책은 세종대왕이 직접 쓴 서문과 왕의 명령으로 학자 8명이 쓴 훈민정음 해례로 구성됩니다. 세종대왕은 서문에서 책을 펴낸 목적과 새로 만든 글자 28자를 소개하고 이를 결합하여 표기하는 방법을 적었습니다. 또한, 학자들은 한글을 만든 원리와 글자를 합하여 쓰는 것에 대한 풀이와 예를 상세히 적었습니다. <훈민정음>은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책이 발견되기 전까지 한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훈민정음>이 나타남으로 그 원리가 뚜렷하게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글은 창제 당시의 글자 28자 가운데 4자가 자연스럽게 소멸하여 24자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글과 같은 글자를 만들고 이를 공용문자로 사용하는 일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새 문자에 대한 해설서를 책으로 출판한 일은 더욱 그러합니다. 한국인의 지혜와 독창성으로 만들어진 최고의 문화유산 한글에 대한 기록 <훈민정음>은 한국의 창조적인 유산입니다.
김장은 한국인들이 길고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많은 양의 김치를 담그는 것입니다. 김치는 무·배추·오이 등의 여러 채소를 소금에 절이고 양념을 버무려 발효시킨 식품인데, 한국인의 식사에 필수적인 음식입니다.
김장 준비는 연중 이루어집니다. 봄철에는 새우·멸치 등의 해산물을 소금에 절여 발효시키고, 여름에는 2~3년 동안 저장할 천일염을 구해서 쓴맛이 빠지도록 합니다. 늦여름에는 빨간 고추를 말려서 가루로 빻아 두고, 늦가을에는 날씨를 고려해 김장날짜를 정하고 김치를 담급니다. 현대에는 여러 김장 준비 과정들이 많이 간소화되었지만 김장을 담그는 문화만큼은 변함이 없습니다.
김장기술은 보통 집안의 여성들에 의해서 전승됩니다. 김장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많은 구성원이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김장 지식과 기술을 전수합니다. 때문에 김치는 그 재료나 담그는 방법 등이 매우 다양합니다. 김장은 학교의 공식적인 과정을 통해서 전승되기도 합니다. 어린이들은 유치원에서 김장 수업을 통해 김치에 익숙해지고, 전문 요리학교에서는 전문가 수준의 김장기술을 훈련합니다.
김장은 사람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한국인들은 김장을 통해 자연에 대한 지식을 배우고 자연의 리듬에 맞춰 살아가는 지혜를 배웁니다. 또한, 김장은 한국인들이 나눔을 생각하고 실천하게 합니다. 김장철마다 한국에는 김치를 담그는 크고 작은 행사가 조직됩니다. 많게는 수천 명의 사람이 참여하는데, 이때 담근 김치는 모두 김치가 필요한 이들에게 기증됩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한국인의 지혜가 담긴 식문화,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한국인의 나눔의 식문화. 한국인이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문화인 김장은 공동체의 소통과 화합을 이끄는 한국의 유산입니다.
씨름은 한국 고유의 운동입니다. 두 사람이 샅바를 맞잡고 힘과 기술을 겨루어 승부를 가리는 전통 민속놀이이자 운동경기입니다. 오랫동안 민속놀이와 무예로써 많은 사랑을 받아오다가 20세기에 현대적인 운동경기로 발전하였습니다.
씨름의 역사는 오랜 한국의 역사와 함께합니다. 4~5세기에 조성된 중국 길림성에 있는 고구려(37 BC~AD 668)의 고분 벽화에 씨름하는 모습이 그려져있는가 하면, 고려시대 (918~1392)와 조선시대 (1392~1910)에는 여러 문헌에 씨름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에는 왕이 친히 아랫사람들과 씨름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씨름이 크게 유행하여 열기가 가열되자 나라에서 씨름을 금지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씨름은 단오, 백중, 한가위 같은 한국의 명절에 많이 행해졌습니다. 특별한 장비나 도구가 필요하지 않고 부상위험이 적어서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씨름은 여러 종류가 있지만, 오늘날에는 ‘왼씨름’ 하나로 통일되어 경기가 진행됩니다. 일반적으로 씨름이라 하면 왼씨름을 말합니다. 씨름기술은 크게 손기술, 다리기술, 허리기술, 혼합기술로 나뉘며 총 54수의 기술이 있습니다.
온몸을 사용하는 씨름은 개인의 정신과 신체를 단련합니다. 또한, 전통적으로는 사회 공동체의 연대와 협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2018년 10월, 한국의 씨름은 남북공동의 유산으로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한국의 오랜 역사 속에서 공동체의 소통과 화합을 이끌어왔던 씨름이 21세기에는 남과 북의 새로운 소통과 화합을 이끄는 한국의 유산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리랑은 한국의 대표적인 민요입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현대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일할 때나 삶에서 만나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아리랑에 담아 노래했습니다. 큰 아픔과 시련의 시기였던 일제강점기(1910~1945)에는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군은 군가로 아리랑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아리랑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라는 공통의 후렴구와 자유롭게 변형이 가능한 사설로 이루어집니다. 곡조는 단순하고, 사설은 누구나 자유롭게 지어낼 수 있어 다양한 변주가 가능합니다. ‘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전승되는 민요는 약 60여 종, 3600여 곡에 이릅니다.
한국의 각 지역에는 전해 내려오는 아리랑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서울과 경기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서울아리랑, 강원도의 ‘정선 아리랑’, 전라도의 ‘진도아리랑’, 경상도의 ‘밀양아리랑’ 등이 있습니다. 각 지역에는 지역의 아리랑을 대중에게 친숙하게 알리고 전승하는 단체와 전수자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리랑은 해외에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전 세계에 거주하는 750만 해외 한국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담은 아리랑을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아리랑은 한국의 역사 속에서 여러 세대를 거치며 한국인이 함께 만들어낸 노래입니다. 또한, 전 세계 곳곳의 한국인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입니다. 세대와 지역을 초월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담아 한국인을 하나 되게 하는 아리랑은 소통과 화합을 이끄는 한국의 유산입니다.
판소리는 한국의 민속 음악입니다. 노래하는 한 명의 ‘소리꾼’이 북을 치는 ‘고수’의 장단에 맞추어 노래와 말, 몸짓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엮어갑니다. 관객들은 ‘얼씨구’, ‘좋다’ 등의 추임새를 더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판소리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조선시대(1392~1910) 중기인 17세기에 시작되었다고 추정됩니다. 이후로 판소리는 19세기에 크게 융성하여 서민부터 양반까지 전 계층에게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많은 작품이 생겨났으며 예술성도 높아졌고 소리를 잘하는 소리꾼은 명창으로서 이름을 떨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심청가>, <춘향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 다섯 작품이 전해지는데,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판소리는 종합예술입니다. 판소리는 노래로 보면 음악이고, 늘어놓는 말로 보면 문학이며, 인물의 성격과 행동을 연기하는 것을 보면 연극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종종 서양의 오페라와 비교되기도 하는데, 서양의 오페라가 화려한 무대에서 교향악단과 무용단, 합창단과 함께 대규모로 공연되는 반면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과 한 명의 고수만으로 모든 공연이 이루어집니다. 현대에는 여러 현대음악 장르와 결합하여 새로운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판소리는 서민들의 보편적인 삶을 음악에 담아내며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소통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판소리가 21세기 한국인의 정체성을 담아 세계에 소개되고, 한국과 세계의 소통과 화합을 이끄는 한국의 유산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한국은 ‘고인돌의 나라’입니다. 고인돌은 거대한 돌을 축조해 만든 거석기념물로 일종의 무덤입니다. 고인돌은 전 세계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특히 중국과 한국, 일본 지역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그 가운데 한반도에는 전 세계 고인돌의 40% 이상에 달하는 남한에 3만 여기, 북한에 1~1만5천 여기의 고인돌이 있습니다.
한국의 고인돌 중 고창·화순·강화의 고인돌이 유명합니다. 이 고인돌 유적은 보존 상태가 좋고 밀집도가 높으며 형식이 다양합니다. 고창 고인돌은 산기슭을 따라 447기가 약 1.8㎞의 지역에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고인돌이 가장 조밀하게 밀집해있으며, 그 형식과 크기가 다양합니다. 화순 고인돌은 계곡을 따라 약 5㎞에 달하는 지역에 597기의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이 있으며 100톤 이상 되는 수십 개의 고인돌과 280여 톤에 이르는 고인돌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고인돌의 채석장이 함께 발견되어 고인돌의 축조 과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강화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한국의 고인돌이 발견된 장소보다 높은 곳에 있으며, 탁자식 고인돌 가운데 가장 크고 멋진 고인돌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탁자식 고인돌은 대부분 한반도 중북부 지역에. 고임돌이 작거나 없는 고인돌은 고창·화순 같은 남부 지역에서 발견됩니다.
전 세계적 곳곳에는 고인돌과 같이 커다란 돌을 이용해 구조물을 만든 거석문화가 발견됩니다. 이들 거석유적은 인류가 알지 못하는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고창·화순·강화의 고인돌 유적 역시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중한 한국의 유산입니다.
석굴암과 불국사는 한국의 신라 시대(57 BC~AD 935)인 8세기에 만들어진 불교 유적입니다. 석굴암은 불상을 모신 석굴이며 불국사는 사찰 건축물입니다. 두 유산은 모두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의 토함산에 있는데 같은 인물에 의해 창건되어 비슷한 시기에 완공되었습니다.
석굴암은 360여 개의 돌을 쌓아 만든 인공 석굴입니다. 네모난 전실과 원형의 주실 그리고 이 두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가 있습니다. 각각의 벽에는 여러 불상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고 원형의 주실 중앙에 본존불이 있습니다. 높이 3.5m의 본존불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표현한 것입니다. 석굴암에는 신라인의 높은 예술성뿐 아니라 과학성과 기술력이 담겨 있습니다. 네모난 돌을 짜 맞추어 만들어낸 돔형 천장과 완벽한 자연 통풍과 채광, 온도와 습기 조절 등이 오늘의 기술로 보아도 놀랍습니다.
불국사는 불법의 세계를 건축물로 구현해낸 사찰입니다. 인공적으로 쌓은 석조 기단 위에 목조건축물이 조화롭게 배치되어있습니다. 불국사의 중심건물인 대웅전 앞마당에는 다보탑과 석가탑이 있는데, 석가탑은 단순하지만 위엄있고 다보탑은 복잡하면서 화려합니다. 특히 1966년 이 석가탑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신라인의 높은 예술성과 과학성, 기술력으로 탄생한 석굴암과 불국사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인 불교 걸작으로 손꼽힙니다. 한국의 석굴암과 불국사는 독창성과 예술성이 빛나는 창조적인 한국의 유산입니다.
종묘는 조선왕조(1392~1910)의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입니다. 조선왕조는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고 종묘제도를 채택하여 왕가의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종묘는 신주를 모시는 정전과 영녕전 그리고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구성됩니다. 건물은 제례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니만큼 장식을 최소화하여 단순하고 간결한 형태로 엄숙함을 자아냅니다. 정전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신주를 모시는 신실 7칸의 규모였으나 왕조가 이어짐에 따라 증축되어 신실 19칸의 규모가 되었습니다. 정전은 신실 길이만 70m에 달하고 좌우 협실과 월랑을 합치면 101m에 달합니다. 이는 동시대 단일 목조건축물 중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입니다. 영녕전도 정전과 같은 방식으로 건축되었고 16칸의 신실이 있습니다.
종묘는 죽은 자를 모시는 사당이니만큼 신문(영혼이 출입하는 문)과 신로(영혼이 출입하는 길)가 있습니다. 왕이라 해도 이 문과 길을 이용할 수 없었고 오직 신주를 운반하거나, 제례 때 제례 물품을 운반할 때에만 이용되었습니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나라는 대부분 종묘제도를 채택했습니다. 하지만 그 건물과 제례가 이어지는 곳은 없습니다. 한국의 종묘에서는 지금도 1년에 한 번씩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제향 의식이 거행됩니다.
유교는 수천 년 동안 한국·중국·일본 등 아시아 지역의 사상을 지배해왔습니다. 종묘는 이러한 유교의 종묘제례 문화의 원류를 경험할 수 있는 세계 유일한 곳입니다. 한국의 종묘는 소중한 한국의 유산이자 세계의 유산입니다.
창덕궁은 서울에 있는 조선왕조(1392~1910)의 궁궐입니다. 서울에는 조선왕조의 궁궐이 5개 있는데 창덕궁은 1405년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건축되었습니다.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졌지만, 조선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입니다.
창덕궁은 자연과 건축이 조화를 이루는 한국 궁궐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창덕궁은 평지가 많지 않은 언덕 지형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자연과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긴 한국인들은 불규칙한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궁궐의 건물은 평지인 남쪽에, 궁궐의 정원은 구릉 지역인 북쪽에 배치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남쪽의 궁궐 건물들 또한 자연지형에 맞추어 융통성 있게 자유롭게 배치했습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에서 궁궐의 중심건물인 인정전까지는 두 차례 방향을 바꾸어야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궁궐 건축의 격식에서 벗어나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창덕궁의 특징입니다.
창덕궁의 공간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궁궐의 정문을 비롯한 진입 공간, 왕이 업무를 보는 공적 공간, 왕과 왕비 그리고 왕실 가족이 생활하는 사적 공간, 마지막으로 창덕궁 전체 면적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정원 공간입니다. 창덕궁의 정원은 ‘후원’이라고 부릅니다. 창덕궁의 후원은 가급적 자연을 그대로 두고 인공적인 손길을 최소화하여 조성했습니다. 후원에는 자연지형을 위압하지 않는 작고 소박한 정자와 연못 등이 자연과 하나로 어우러져 있습니다. 이 또한 자연미를 아름답게 여기는 한국 전통정원의 특징입니다.
창덕궁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건축과 정원 설계의 우수 사례로 꼽힙니다. 유교의 궁궐 건축을 따르면서도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한국 궁궐 건축과 조경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창덕궁은 창조적인 한국의 유산입니다.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은 지구의 지질학적 역사를 잘 보여주는 자연입니다. 화산폭발로 형성된 제주도는 섬 전체가 독특한 화산지형과 아름다운 경관으로 가득합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한라산입니다. 한라산은 제주도의 중앙에 솟아 있는 1,950m 높이의 화산입니다. 산 정상에는 화구호인 백록담이 있고, 용암이 급히 식으며 형성된 주상절리, 기생화산 등 다양한 화산지형이 있습니다. 또한 산세가 저지대에서 고지대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생태계가 매우 다양합니다. 한라산 일대는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거문오름(456m)과 용암동굴이 있습니다. 제주도에는 소형 화산체인 기생화산이 많습니다. 제주말로 기생화산을 ‘오름’이라고 하는데 제주 전역에 368개의 오름이 있습니다. 거문오름은 제주 동북쪽에 있습니다. 거문오름에서 분출된 용암은 주변을 따라 흐르며 일련의 용암동굴을 만들었습니다. 이 용암동굴에는 만장굴, 김녕굴, 벵뒤굴, 당처물동굴, 용천동굴 등이 있습니다. 이 동굴들은 각각 길이, 구조, 구성 성분 등이 매우 다양하고 독특합니다. 마지막으로 제주 동쪽 끝에 있는 성산일출봉(179m)이 있습니다. 성산일출봉은 해저에서 화산이 분출되어 형성되었습니다. 분화구의 크기는 직경 570m, 깊이 90m로 거대합니다. 분화구 둘레의 외벽은 경사가 매우 가파른데, 이 절벽들이 모두 파도에 침식되어 화산 내부 구조를 잘 보여줍니다. 이는 화산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한라산 천연보호구역’,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성산일출봉 응회구’는 제주도의 다양한 화산지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좁은 면적 안에 이처럼 다양한 화산지형을 보여주는 곳은 제주도가 세계에서 유일합니다.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은 지구의 지질학적 역사 보여주는 소중한 한국의 유산입니다.
한반도의 서해안과 남해안은 갯벌이 발달해있습니다. 갯벌은 밀물 때는 물에 잠기고 썰물 때는 드러나는 연안의 평탄한 지역을 말합니다. 오랫동안 조류에 의해 운반된 미세한 흙들이 퇴적되어 형성된 지형입니다.
한국의 갯벌 면적은 2,489㎢으로 이중 서천갯벌(충남 서천), 고창갯벌(전북 고창), 신안갯벌(전남 신안), 보성·순천갯벌(전남 보성·순천)이 유명합니다. 한국의 갯벌은 오랫동안 한국인의 삶의 터전이 되어왔고 동시에 많은 동식물의 터전이 되어왔습니다. 한국의 갯벌에는 물새 118종, 대형저서동물 857종, 저서규조류 375종, 해조류 152종, 염생식물 55종, 어류 54종 등 총 2,150종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멸종위기종과 한국고유종도 있습니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적색목록(Red List)에 등재된 22종의 물새와 해양 무척추동물 5종, 범게를 포함한 고유종 47종 등 희귀종이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갯벌은 동아시아와 오세아니아를 이동하는 철새들에게 중요한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합니다.
과거에 한국의 갯벌은 그 가치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기능과 가치가 다양하게 밝혀지면서 새롭게 인식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한국인의 삶의 터전이 되어왔고 다양한 동식물의 서식지가 되고 있으며 오늘도 지구생태계를 묵묵히 지켜나가는 한국의 갯벌은 소중한 한국의 유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