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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활자 인쇄술을 처음으로 발명한 것은 바로 우리 민족이다. 고려시대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하고 이를 실용화하였다. 그러나 금속활자 인쇄술 발명의 기원에 관하여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기록과 실물의 부족으로 인하여 고려 문종연간(1047∼1083) 기원설, 숙종 7(1102)년 기원설, 예종 15(1120)년 기원설, 충열왕 23(1297)년 기원설, 고종 19(1232)년 이전 기원설 등이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다.고려시대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창안된 것이어서 활자의 주조에 있어서는 활자의 크기와 모양이 고르지 않고 자획의 굵기가 일정하지 않았으며, 부분적으로 획이 나타나지 않아 인쇄상태가 깨끗하지 못하였다.

조판술에 있어서도 사주와 계선까지 고착된 인판틀에 크기와 두께가 일정하지 않은 활자를 무리하게 배열하였기 때문에 옆줄이 맞지 않고 위아래 글자끼리 획이 엇물리거나 각 줄에는 글자의 출입이 있었다. 기록과 실물을 통하여 우리나라 금속활자인쇄술의 초창기인 고려시대의 금속활자에 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증도가」자

남면화상송증도가 증도가자(證道歌字)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를 찍어낸 금속활자이다. 남명 법천선사가 선종의 진리를 한층 오묘하게 논설한 본서의 초간본은 1076년 중국 절강성의 괄창이라는 곳에서 간행되었는데, 고려는 송(宋)의 초간본이 수입되자 이를 금속활자로 찍어내 유통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금속활자도 금속활자 인쇄한 책도 전래되지 않아 누가·언제·어디에서 금속활자를 주조하였는지 또 누가·언제·어디에서 그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찍어냈는지에 관해서는 알 수 있는 근거가 없다.

활자의 크기는 1.0 1.0㎝였으나, 자수는 알 수 없는데 다행히 번각본에 번각간행에 관한 기록이 있어 그시기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번각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책끝에는 『이에 공장들을 모집하고 주자본을 중조하여 오래도록 전해지게 하고자 하는 바이다. 기해(1239)년 9월 상순에 중서령 진양공 최이는 삼가 기록하는 바이다』라는 기록이 나타나 있다.

이를 통해 번각본은 이미 금속활자(金屬活字)로 간행되었던 판본을 몽고군이 쳐들어와 강화도로 천도한 1239년 9월에 번각한 것이며, 그 원본이 되었던 금속활자본은 강화도로 천도하기 전인 고종 19(1232)년 이전에 개경에서 찍어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상정예문」자

동국이상국집상정예문자(詳定禮文字)는 「상정예문(詳定禮文)」을 찍어낸 금속활자이다. 「상정예문」은 고려 인종 때에 최윤의(崔允儀) 등을 비롯한 17명의 문신들이 임금의 명에 따라 고금의 예의를 수집하고 이를 참고로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도록 50권으로 편찬한 전례서였으나, 그 실물은 현존되지 않고 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의하면 「상정예문」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책장이 탈락되고 글자가 떨어져 나가 내용을 살피기 어려웠으므로 최이의 선친인 최충헌이 2부를 보집하게 하여 1부는 예관에, 다른 1부는 자기의 집에 두었으나 후에 몽고군이 침입하여 강화로 천도할 때 예관에 있던 것은 가져오지 못하여 없어지고 최이의 가장본만 남게 되자 금속활자로 28부를 간행하여 여러 관사에 분장시키고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도 「상정예문」이 금속활자로 간행된 시기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최이가 진양공에 책봉된 것이 고종 2l(1234)년이며 대작한 이규보가 고종 28(l241)년에 서거한 점으로 미루어 그 간행의 시기는 1234년에서 1241년 사이의 어느 때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도 기록으로 전해질 뿐, 금속활자나 금속활자본이 전해지는 것이 없어 활자의 크기나 자수 등은 전혀 알 수 없다.


「흥덕사」자

자비흥덕사자(興德寺字)는 청주에 있었던 흥덕사에서 「직지(直指)」와 「자비도량참법집해(慈悲道場讖法集解)」 등을 찍어낸 금속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활자의 크기는 대자 1.0 1.0㎝, 소자 1.0 0.5㎝였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백운화상이 저술한 2권 2책본의 「직지」 금속활자본은 현재 첫째 장이 떨어져나간 총 38장의 하권 1책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전래되고 있으며,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다.

금속활자본 「직지」의 책끝에는 「선광칠년정사칠월일청주목외흥덕사주자인시(宣光七年丁巳七月日淸州牧外興德寺鑄字印施)」라는 간기가 있어, 우왕 3(1377)년 7월에 청주목 외곽에 있었던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흥덕사에서는 「자비도량참법집해」도 금속활자로 찍어낸 바 있었음이 그 번각본이 국내에서 발견됨으로써 알려졌다. 번각본 「자비도량참법집해」에는 간행시기를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은 없으나, 본서의 금속활자본이 청주의 흥덕사에서 인출된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직지」와 「자비도량참법집해」 등을 통해서 볼 때, 흥덕사 나름의 재래식 방법으로 주조한 흥덕사자는 중앙관서에서 주조한 금속활자인 증도가자에 비하여, 글자의 크기와 모양이 고르지 않고 조잡하며 조판술도 미숙한 편이다.

그러나 원의 굴욕적인 지배로 중앙관서에서의 금속활자주조와 인출의 기능이 마비되었던 당시에 흥덕사는 금속활자를 주조하고 서적을 인출하여 고려시대 금속활자인쇄술의 맥을 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고려 「복」활자와 「전」활자

복활자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개성의 개인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고려시대 금속활자인 복활자 하나가 있고 개성박물관에도 고려의 왕궁이 있었던 개성 만월대 신봉문에서 출토된 고려시대의 금속활자(金屬活字)인 전활자 하나가 전해지고 있다.

이들 활자는 한결같이 누가 무슨 용도로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들 활자는 고려시대 금속활자의 주조와 책의 간행을 실증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는 활자들이다.

고려 복활자의 크기는 1.0 1.0㎝이며 이 글자는 자전에도 나타나지 않는 벽자이므로 일반적인 저작을 간행하기 위한 금속활자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활자의 주조방법이 아주 미숙하여 활자의 모양이 가지런하지 않고 자획이 고르지 않으며 네 변의 길이도 앞뒤로 차이가 있고 활자의 뒷면이 타원형으로 옴폭 파져있다.

글자체는 송설체 계열인데 1975년 3월에 실시한 분석에 의하면 구리 50.9, 아연 0.7, 주석 28.5, 납 10.2, 철 2.2%의 금속성분을 함유하고 있다. 고려 전 활자에 관하여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다만 이들 복활자나 전활자는 여러 가지 특징과 정황을 고려할 때 고려후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